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윌리엄 제임스 사이디스 (문단 편집) == 대학입학과 중기 생애 == 사이디스의 아버지는 하버드 대학의 교수였으며, 그는 어린 시디스를 [[하버드]]에 보내고 싶어했다. 1906년, 8살의 사이디스는 하버드에 진학하려고 했으나 하버드는 사이디스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거절했다. 그는 10살 때 미국 메사추세츠주의 [[터프츠 대학교]]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1909년 11살의 나이로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다. 이는 하버드 대학교 역대 최연소 입학이다. 1910년 초, 12살의 그는 수많은 교수와 학생들이 있는 하버드 대학교의 수학클럽에서 사차원 물체에 대한 강연을 하였다. 이에 깊은 인상을 받은 [[MIT]]교수이자 물리학자, 엔지니어 다니엘 프로스트 콤스톡(Daniel Frost Comstock, 1883 ~ 1970) 교수는 시디스가 미래에 수학계를 이끄는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사이디스는 1910년에 정규 대학과정을 시작해 1914년 16살에 하버드 대학교를 수학 전공으로 쿰라우데(cum laude) 등급으로 졸업했고 바로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으로 진학하여 수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대학원 입학 이후 사이디스는 몇몇 하버드 학생들과 충돌했고 시디스의 어머니는 [[휴스턴]]에 위치한 [[라이스 대학]]의 수학과 대학원생 겸 조교 자리를 구해주었다. 거기서 그는 대학생들에게 유클리드 기하학, 비유클리드 기하학, 삼각법 3가지를 가르쳤다. 그러나 자신들보다 나이 어린 선생을 대하는 학생들의 태도, 언론의 과도한 주목, 시디스 본인의 교직생활에 대한 실패[* 학습성과가 높지만 내성적인 성향인 사람들이 타인의 교육지도를 어려워하는 경우는 흔하다. [[시어도어 카진스키]]가 이와 유사한 예시로, 월반, 조기졸업, 젊은 나이에 교직에 섰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학생들의 교수평가는 매우 좋지 않았다.] 등으로 인해 몇 개월 만에 그만뒀다. 이후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해서 3학년까지 좋은 성적으로 다녔으나, 졸업을 앞두고 중퇴했다. 그 와중 사이디스는 [[사회주의자]], [[무신론자]], 극좌주의자들이 대거 참여한 [[노동절]] 전쟁반대운동에 참여한 뒤 징역 18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였는데, 그 자신이 전쟁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현재 한국에서의 양심적 병역거부는 99% 이상이 종교적인 이유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을 믿느냐"는 판사의 질문에 대해 시디스는 "나는 어떠한 신도 믿지 않는다"고 답했다. 20세기 초반의 미국 사회에서 무신론자가 어떤 대우를 받았을지 생각해보면 정말 대담한 발언이다. 석방 이후 사이디스의 부모는 그를 [[정신병원]]에 가두겠다고 협박했다. 이 말에 화가 난 그는 부모와 의절한 뒤 미국 동부로 도주, 그곳에서 마켓 점원 등 단순노동의 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